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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임상시험 흔들기 이젠 멈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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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조회 976회 작성일 19-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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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임상시험 흔들기 이젠 멈춰야

이형기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출처 서울경제 )

  • 2017-03-02 15:28:37
  • 사외칼럼


1954년 늦은 봄 미국은 여느 해와 달랐다. 항상 예년 이맘때면 곧 기승을 부릴 폴리오(소아마비) 감염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전역에 걸쳐 소아 180만명이 백신 임상시험에 자원하려고 팔을 걷어붙였다.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폴리오 파이오니어’라고 불렀다.

이 중 21만명은 비교를 위해 효과가 없는 가짜약(플라시보)을 투여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폴리오 파이오니어의 결연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의 결기와 헌신에 힘입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공중보건 실험’이라 일컬어지는 폴리오 백신 임상시험이 성공했다. 그 이후 인류는 폴리오로 죽거나, 사지가 마비되거나, 아니면 호흡 근육이 마비돼 평생을 기계 호흡장치에 의존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해방됐다. 

이처럼 임상시험 없이 신약개발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폴리오 파이오니어의 예에서 보듯, 임상시험 참여는 성숙한 시민이라면 모두가 나눠 감당해야 하는 일종의 책무다.

하지만 2017년 한국에는 신약개발의 단물만 빼먹으려는 저급한 얌체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언론은 ‘임상 아르바이트에 몸 맡기신 어른들’ 또는 ‘마루타 생동 고액 알바’라며 호들갑을 떤다. 마치 노인 빈곤과 청년 실업의 벼랑 끝에 내몰린 저소득 노인이나 무직 청년이 돈으로 매수돼, 마지못해 임상시험과 생동성시험(시판 의약품과 복제 약의 약효가 같은지 검증하는 시험)에 참여라도 한 것처럼 왜곡을 일삼는다. 이 정도라면 한국에서 임상시험·생동성시험 참여는 거의 ‘몸 팔아 돈 버는’ 매춘의 경지다.

급기야 고시원 월세를 못 내 쫓겨나게 된 청년이 돈을 벌려고 생동성시험에 참여한 후 약물 부작용으로 초능력을 얻게 된다는 판타지 드라마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청년이 생동성 알바를 하길래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질까.

2014년 우리나라에서 제네릭의약품의 허가를 받으려고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제출된 생동성시험계획서는 모두 148건이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연평균 시험건수는 대략 1,000건이었다. 따라서 미국의 인구가 한국의 여섯 배 정도임을 감안할 때, 한국이 마치 생동성시험이 판치는 나라라도 된 양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떤 병은 노인에서 흔하거나 약물 반응이 젊은이와 다르다. 따라서 노인이 임상시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노인 치료에 필요한 약물 정보를 얻을 방법이 없다. 요컨대 짐짓 노인을 위하는 척하며 임상시험 참여를 가로막지만 정작 피해는 고스란히 노인의 몫인 셈.

생동성시험을 통해 제네릭의약품이 허가되지 않으면 비싼 오리지널 약을 써야 한다. 그러니 생동성시험에 참여하는 청년을 마루타라며 비아냥거리거나 생동성시험을 실시하는 제약기업을 악덕업자로 매도할 게 아니라 오히려 이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신약개발 임상시험을 실시하기 위해 전 세계가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의료 수준이 높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안전하고 윤리적인 임상시험을 실시할 수 있는 선진 제도와 인프라가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식약처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에 성공적인 규제 선진화를 이뤄냈다. 생동성시험의 경우 자료 조작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투명성을 극대화했다. 게다가 연구의 매 단계를 의료기관의 품질관리자가 실시간으로 감독하고, 나중에 식약처가 실사를 통해 일일이 그 결과를 확인하는 제도가 정착된 지 오래다.  

안도현 시인이 일갈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폴리오 파이오니어같은 헌신을 기대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임상시험 참여자를 알바로 모욕하고 연구자나 식약처를 발로 차는 일은 이제 멈춰야 한다. 적어도 그들은 누구에게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이형기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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